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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une 14, 2020

교리로써의 사랑 - 에큐메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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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오늘은 초대교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랑’이라는 교리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사랑을 교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교회의 교리가 확립되지 않았던 시절, 사도 바울이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편지에 사랑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이는 이들이 사랑이라는 교리를 만들어가고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고린도전서를 살펴보면서 사도 바울이 왜 사랑을 이야기했는지는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교회가 생겨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사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왜 사랑을 이야기했는지 여러 서신의 말씀을 보며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또 지금 우리는 어떤 사랑을 실천할지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새 계명

신약성경에 ‘요한’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이 몇 권 있습니다. 요한복음, 요한 1, 2, 3서, 요한계시록 이렇게 다섯 권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다섯 권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요한 2, 3서에는 장로라는 직분이 기록되어 있기에 장로 요한이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또 요한2서는 요한1서의 내용을 요약본으로 볼 수 있어서 같은 사람이 기록했다고 말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편지를 요약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경우도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가 기록했다고 말하는데, 이 제자는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세대배의 아들 요한이 저자라고 말했을 때, 공관복음서와 충돌하는 지점이 몇 곳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스스로를 요한이라고 밝히지만, 그가 누구인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논쟁은 우리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이기 때문에 제외하고,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은 초대교회 시기에 기록되었고, 교회의 교리가 확립되어 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이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유사점이 많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3:34-35절 말씀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전에 설교 말씀으로 전해드린 적이 있지만, 이 말씀은 유월절을 지키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직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전에 드렸던 말씀을 다시 드리자면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결론만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는 신분의 높낮이를 없애자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낮고 천해 보이는 일, 우리가 전혀 하고 싶지 않은 일까지도 서로에게 실천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전해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요한1서 본문에서도 새 계명이 언급됩니다. 2장 8절에 나타난 ‘새 계명’은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읽었던, 새로운 빛, 참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9절 이후에서는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형제에 대한 말씀은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요한1서도 새 계명과 사랑을 연결 시킵니다. 이는 바로 앞 본문인 3-5절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습니다. 이는 5장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5장 1-3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드러나게 되며, 이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요한복음이나 요한서신의 말씀들을 읽다보면, 사랑이라는 개념이 추가됨으로 옛 계명과 새 계명이 구분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율법들은 사랑이 없는, 단지 지켜야만 하는 규정이고,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말씀은 율법 규정이 없어진 사랑하는 마음만 남겨진 무엇인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요한1서는 비록 옛 계명과 새 계명의 구분은 하고 있지만, 이 둘 사이에 큰 차이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에게 잘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옛 계명과 새 계명의 차이는 이를 지키는 마음가짐에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것이 율법이기 때문에 지켜 행해왔다면, 이제는 이를 실천하는 일이 사랑임을 알기 때문에 실천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모두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지키며 사랑을 행해야 합니다.

형제 사랑

그런데 이 사랑의 일차 대상을 대부분의 서신은 ‘형제’로 한정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여러 서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0절에서 사도바울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권면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도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9절에서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라고 말합니다. 다른 교회라면 형제 사랑에 관해 쓰겠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미 서로를 사랑하고 있기에 이에 대해서는 적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서신 이외의 서신에서도 형제 사랑은 종종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13장 1절은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서도 이와같이 말합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오늘 저희가 읽은 요한1서 본문도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새 계명을 이야기하면서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에서 나타난 형제는 아마 피를 나눈 형제를 의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 성도들을 형제로 부르며, 성도들 간에 사랑을 나눠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교리를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성도들 간의 사랑을 하나의 교리로 만들어갔다는 말은 성도들 간에 불화가 있었음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이는 고린도전서가 교회의 불화를 다루는 가운데 13장에서 사랑을 강조하는 점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에는 형제들 간에 서로 비방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지 율법을 잘 지켰는지 판단하는 재판관이 아니며 재판관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의 말씀 역시도 교회 안에서 일어난 불화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게 합니다.

당시 교회 구성원 간의 불화에는 사회적인 요인도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는 계급사회였고 노예제도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2절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자신들의 윗사람이 교회 안에서 하나의 형제가 되었다고 해서 그들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말합니다. 계급사회, 노예제도가 있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평등하다는 이야기를 전할 때 발생하는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하나의 교리로 확립시키고 이를 통해 교회에 안정을 가져오려고 했던 노력은 당연합니다. 여기에서 저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들이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바라보며 사랑을 교리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초대교회가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해야 함을 말할 때, 이들이 가진 논리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우리가 미워할 수 없으며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부정하다고 여김받는 사람, 병들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는 이들을 돕고 이끌며 살아가야 한다는 예수님의 삶을 초대교회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따르자고 합니다.

초대교회가 말한 사랑의 대상은 분명 자신들의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대상은 자연스럽게 넓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들과 교류를 갖는 여러 교회의 성도들, 교류가 없더라도 같은 신앙을 가진 교회의 성도들로 확장됩니다.

이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 하나님을 믿건 믿지 않건, 죄를 범한 사람이건, 부정한 사람이건, 병든 사람이건, 누구라도 사랑해야 한다는 교리로 발전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역시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사랑

지금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교리, 자연까지도 사랑하고 아끼며 지켜야 한다는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다시 초대교회의 상황으로 돌아가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교리는 너무나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모두 박애주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어렵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기보다 가장 기초에 있는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하려는 마음을 갖는 일부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넓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단계로 성도들 간의 사랑을 말씀드리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 지금의 교회들을 보면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이를 위로하는 공동체입니까? 아니면 구원, 복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저 모여있을 뿐일 공동체입니까?

교회의 불화는 딱히 이야기 드리지 않아도 많이 들어오셨을 것이기 때문에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지금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가족보다 교회 성도님들을 더 자주 만나기도 합니다. 가족은 일주일에 한 번도 안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주 만나며 함께 신앙을 나누는 우리는, 서로를 믿으며 신앙을 나눕니까? 교회 안에 존재하는 친한 사람들의 모임은 존재합니다. 이런 모임 말고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님을 믿고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는 여전히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가 먼저 사랑을 회복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교회의 인원이 늘어남에 따라 이 일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럼에도 최대한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가 됩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며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아플 때 우리 곁에서 치유하시며 위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우리의 아픔과 어려움이 우리에게 약점이 될 수 없고, 부끄러움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로의 아픔을 감싸주고 위로해 줄 수 있기에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 힘들고 어려울 때,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기에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 그렇기에 모이면 편하고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걸음씩 걸음을 떼어나가길 바랍니다. 교회 안에는 우리와 생각이 다른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정치적 견해가 완전히 다른 사람도, 삶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헬조선을 경험하는 청년들도 있고, 과거 어려웠던 시절을 극복해오신 어른들도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서로 다름만 느껴질지도 모르는 집단이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서로를 믿어야 합니다.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그 사랑 안에 거하고자 이곳에 모였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됩시다.

이런 사랑이 넘칠 때, 다른 교회, 세상을 향한 사랑까지도 전할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퍼져나간 곳이 하나님 나라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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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14, 2020 at 01:08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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